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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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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군주는 왜 한나라 황후에게 ‘성희롱 편지’를 썼을까 약 2200년 전 중국 중원을 공포로 몰아붙인 종족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진시황 이후 어지러워진 중국대륙에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즉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세를 자랑했던 항우마저 제압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은 한나라 개국시조 고조 유방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차지한 한나라를 우습게 본 종족이 흉노족이었다. 몇가지 일화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발굴팀이 2012년 몽골 골모드에서 발굴한 동복(구리솥). 흉노인들은 이 청동솥을 가지고 다니면서 요리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에피소드 ①“잔말 말고 조공품이나 보내라” 언젠가 한나라 사신이 흉노의 풍습을 ‘오랑캐가 아니냐’면서 비아냥댄 일이 있었다. “흉노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지요? 또 아비와 아들이 같은 천막에..
'사람 얼굴 모양' 출토된 무덤에서 알아보는 흉노역사 몽골 연구기관과의 협약으로 몽골 현지의 흉노유적을 발굴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조사팀이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허리띠 장식 등 흉노유물을 찾았다.국립중앙박물관은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연구소 등과의 협약으로 몽골 헨티 아이막의 도르딕 나르스 유적의 흉노무덤 200여기 중 가장 큰 제160호 무덤과 그 무덤에 딸린 배장묘를 조사한 결과 사람얼굴모양의 은제허리띠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은제 허리띠 장식의 경우 비슷한 형태를 한 2점이 피장자의 허리부분에서 출토됐다. 이런 형태의 유물은 러시아내 몽골자치공화국인 부랴트 공화국의 차람 고분군 등 몽골 동북부 지역의 흉노무덤 등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유물의 연대는 기원후 1세기 쯤으로 편년된다. 기원후 1세기 흉노족 무덤에서 발굴된 사람 얼굴 모양의 은제..
"성락원 바위글씨는 '나만의 집(장외가)'…누가 '추사 코스프레'했나"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이트에 쓰여있는 명승 제35호 성락원 설명자료이다.성락원 영벽지 바위에 새겨진 글씨. 지금까지는 ‘장빙가(檣氷家)’로 읽어 ‘고드름이 열린 집’이라는 의미로 통용됐다. 그러나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빙’자는 ‘외(外)’자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연구원은 후한시대의 이른바 팔분법에 따라 표기된 용례를 들어 ‘장외가’는 ‘아름답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성락원은 1992년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최근..
흥선대원군은 왜 경복궁 현판바탕에 검은색을 칠했을까 ‘박정희 친필 한글 글씨(1968년)→하얀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문글씨·2010년)→검은색 바탕의 황금빛 동판글씨(2019년)’로…. 14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 회의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광화문 현판의 재복원방식이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동판글씨’로 결정됨으로써 9년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광화문 현판의 제작방식 논란은 2010년 광복절 광화문 복원에 맞춰 내건 현판이 불과 몇개월만에 균열이 생겼고, 문화재청이 그해 연말 전격적으로 교체를 결정함으로써 전개됐다. 하지만 광화문 현판 논쟁은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가로쓰기 한글 현판이 걸리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그렇게보면 50년도 더 된 논쟁이었다. 1865~68년 사이에 경복궁과 함께 복원..
일제는 왜 서대문(돈의문)은 헐고 남대문(숭례문)은 살렸나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 1915년 3월4일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 답지않은 기사를 싣는다. 돈의문(서대문)의 철거를 의인화해서 ‘영원히 사라질 돈의문(서대문)’을 안타까워했다. 기사는 “나는 1421년(세종 3년) 팔도장정 30만명의 손으로 탄생한 성문 8곳, 즉 8형제 중 둘째되는 돈의문이다”로 시작된다. “이름 덕분에 몇백년 먹어도 갓난아이처럼 ‘새문 새문’소리를 듣더니…여러분과 인연이 끝나 경매되어 팔린답니다…조국에 변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나도 국가의 간성(干城)노릇을 해서 성밑에 몰려드는 적군의 탄환과 화살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지엄하게 한성의 서편을 지켰는데 다만 경매 몇푼에….” 돈의문 철거소식을 의인화해서 알린 매일신보 1915년 3월4일자.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으로 철거..
관통도로에 일왕연호 '소화'까지…일제의 종묘 훼손 증거 나왔다 ‘소화(昭和) 8년 3월 개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당인 종묘(사적 제125호)의 외곽담장에는 국권침탈의 뼈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조선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국가사당에 일본 왕(히로히토·裕仁)의 연호인 ‘소화(昭和·1926~89)’ 글자를 새긴 것이 9개나 된다. 그런데 이 일본 왕의 연호인 ‘소화’ 명문이 일제가 1932년 종묘~창덕궁·창경궁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종묘담장을 개축하고 새긴 모욕의 상징이라는 추정이 나왔다.종묘 외곽담장에 새겨진 일왕 히로히토(재위 1926~1989년)연호. 소화(쇼와·昭和) 8년은 1933년에 해당된다.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지나는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담장을 수리한 증거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궁능사업본부 종묘관리소 제문화재청 궁..
내시가 조성한 정원, 과연 문화재의 가치가 있을까 ‘새롭게 밝혀진 내시의 별장, 문화재 가치가 있는가.’ 최근들어 조선조 철종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자 의친왕의 별궁으로 ‘200년 조선의 비밀정원’이라는 이유를 들어 명승(제35호)으로 지정된(1992년) 성락원(서울 성북동)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 결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1983년과 92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는 애초부터 없었는데, 문화재관리국이 성락원 소유자의 근거없는 주장을 검증없이 받아들였다는 비..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고분…담로제의 흔적?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이 나타난 것일까.’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관(독널)을 묻은 묘제를 일컫는다. 옹관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문화권임을 상징하는 묘제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형옹관의 핵심분포권인 반남고분군 인근에 옹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고분이 버티고 있다. 나주 송제리고분 돌방에서 수습한 은제관식과 하단 고정 못. 6세기 전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복식(옷과 장식)인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전혀 어울리지못한 고분 영산강 지류인 금천과 만나는 전남 나주 세지면 송제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송제리 고분이다. 예부터 ‘동산’이니 ‘고려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