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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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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 '김봉남'과 차은택 '민머리' ‘(앙)뇽하세요. (드)자이너에요. (레)이름은요. (김)봉남이에요.’ 한때 유행했던 ‘앙드레김’ 소재의 4행시다. 이 4행시의 유래를 알면 좀 씁쓸하다. 1999년 8월 24일 옷로비 사건을 다룬 국회청문회장에 색조 화장에 하얀 재킷을 입고 출석한 이가 있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였다. 김씨는 증인선서에서 ‘주민번호 350824…이름 앙드레김’이라 했다. 목요상 국회 법사위원장이 ‘예명 말고 본명을 대라’고 닥달했다. 그러자 앙드레 김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봉남’이라 답했다. 세련미의 극치를 자랑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나이가 벌써 64살이고, 본명 또한 그렇게 토속적이라니…. 방청석은 웃음바다로 변했고, ‘앙드레 김’은 아무 잘못도 없이 ‘김봉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놀림감의 대상이 되었다..
정유라의 말(言)과 말(馬) 1412년 칠성군 윤저가 태종이 주최한 연회에서 감히 임금을 향해 ‘후궁을 그만 들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아무리 임금이 ‘과인의 잘잘못을 한번 고해보라’고 상을 차려준 자리였지만 ‘제발 여자 좀 작작 밝히라’는 직격탄을 날렸으니 분위기가 일순 싸해졌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는 칭찬과 함께 임금의 애마, 즉 안장 얹은 말 한 필을 하사했다. 윤저는 손사래를 쳤지만 태종은 “사양 마라. 받았다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된다”고 권했다. 윤저는 한마디 직언의 대가로 ‘대통령 전용 승용차’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심지어 ‘기분이다. 까짓것 되팔아도 좋다’는 허락까지 얻었으니…. 차가 없던 시절 말 한 필의 가치는 지금의 최고급 승용차에 비견될 수 있다. 왕·귀족들은 앞다퉈 좋은 말을 구해..
핫도그에 개고기 있었을까 "음식에 개라니…. 안될 말이다.”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가 ‘핫도그(hotdog)’ 이름을 ‘핫소시지’로 바꿀 것 같다. 이슬람 문화권은 (犬)를 부정한 동물로 여긴다. 말레이시아 이슬람개발부는 “도그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음식메뉴는 ‘할랄(이슬람 음식)’ 인증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하기야 이상하기는 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소시지를 끼워 먹는 빵 음식을 ‘핫도그’라 했을까. 설이 난무하다보니 딱 이거다 할 주장을 찾기 어렵다. 다만 1600년대 말 독일 바이에른주 코르부크의 정육업자인 요한 게오르그 라너가 독일산 개인 ‘닥스훈트’를 닮은 소시지를 만들었다는 설이 그나마 그럴 듯 하다.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은 독일개와 비슷한 소시지라는 의미에서 ‘닥스훈트 소시지’ 혹은 ‘작은 개 소시..
원숭이 돌도끼와 사람의 돌도끼는 같다? 땅속에서 출토된 돌도끼는 예부터 하늘의 신물(神物)로 여겨졌다. 번개와 벼락신인 뇌공이 내려준 뇌부(雷斧)라 해서 신성시했다. 갈아 먹으면 말끔히 낫는다는 믿음 때문인지 임질(요로결석?)을 앓던 조선 세종 임금을 위해 돌도끼를 찾아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카푸친 원숭이가 돌도끼를 만드는 모습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압구정엔 갈매기가 없다 누정(樓亭)은 예부터 서민의 공간이 아니었다. 2000년 전의 역사서인 를 보면 “황제가 신선들이 좋아하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동성왕과 무왕은 궁성에 못을 파고 누각을 세워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군신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궁중의 휴식공간이던 이같은 누정은 후대에는 음풍농월하던 사대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가장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압구정일 것이다. 지금도 ‘부티’나는 동네의 상징으로 운위되고 있으니 말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의 서재 이름에서 땄다. 명나라 예겸(1415~1479)이 중국을 방문한 한명회에게 붙여주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훗날 3000냥을 들여 꾸민 것을 그렸다.|간송미술관 소장 “기심(機..
보일듯이 보이지 않던 따오기의 울음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한정동의 동시 ‘따오기’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읊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새라서 ‘니포니아 니폰(Nipponia nippon)’이라는 학명이 붙었다. 훗날 동요로 거듭난 ‘따오기’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애환을 표현한 노래로 금지곡이 됐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1960~70년대엔 ‘보일듯 보이지 않는…’의 가사 때문에 ‘미니스커트’의 다른 말로 전용되기도 했다. 몸길이가 70㎝에 이르는 따오기는 ‘황새의 재판’ 설화에서 뇌물공여자로 등장한다. 꾀꼬리·뻐꾸기와 목소리 소송을 벌이던 따오기는 ‘재판관’ 황새를 찾아가 개구리를 바쳤다. 뇌물공세는 주효했다. 재판관 황새는 곱디고운 꾀꼬리·뻐꾸기의..
교황은 왜 고려국왕에게 친서를 보냈나 지금까지 한반도를 방문한 첫번째 서양인은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2월 왜군을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기록이 수정될 운명에 놓였다.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1333년(충숙왕 복위2년)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한다”는 친서의 필사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의 제작팀과 세계종교평화협의회측이 각기 다른 경로로 확보한 라틴어 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을 담고 있다. 바티칸 비밀수장고에 있었던 교황의 친서. 1333년 고려왕(충숙왕)에게 교황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보낸 친서다.|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 우광훈 감독 제공 “존경하는 고려국왕께…”로 시작하는 서한은 “고려왕도 기독교..
신라 경주엔 황금칠을 한 기와집이 있었다. 880년 9월9일 신라 헌강왕은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지금 민간인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覆屋以瓦不以茅)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 입을 모았다. 는 “경주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는 “전성기 경주엔 황금을 입힌 저택(金入宅) 39채를 포함해서 17만8936호가 있었다”고 정확한 숫자까지 기록했다. 신라시대와 견줄 수 없지만 지금도 경주엔 1만2000채에 이르는 기와집(한옥)이 있다. 정부가 ‘고도(古都)이미지 찾기 사업’의 하나로 적극 장려한 덕분이다. 특히 황남동·인왕동·구황동·교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