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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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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백제, 풍납토성의 발견비화(상)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 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풍납토성 유구. 493년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다.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 1925년 여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가 한강변을 휩쓸었다. 한강이 범람했고, 강변에 ..
광주에서 발견된 2000년 전 현악기 지난 1992년 5월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였던 조현종이 광주 신창동을 찾았다.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가 한창이던 현장이 아무래도 걸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무작정 공사현장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42년전에도 어린아이 독무덤이 발굴된 곳인데요. 그렇다면 당대 사람들이 경작한 농경지 유적이 있을 게 분명한데 아무런 조사 없이 공사가 강행되니까요. 고고학자들이 공사현장을 찾으면 담당자들이 무척 싫어하니까 신분을 속이고 이리저리 살폈죠.” 독무덤이 발견된 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연약지반, 즉 농경지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유심히 살피던 조현종은 극적으로 2,000여 년 전 역사의 실마리를 잡는다. “2,000년 전 홍수 등에 의해 범람했던 흔적인 퇴적층에서 모래와 흙을 긁어모아 비닐에 담..
소황제와 6개의 지갑 ‘샤오황디(소황제·小皇帝)’는 1979년 시작된 중국의 1가정 1자녀 정책의 산물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격동기를 겪은 부모세대는 가난과 무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하나 뿐인 ‘금쪽같은 내 새끼’를 꼬마황제로 떠받들며 키웠다. 이 정책은 중국 사회의 근간을 뿌리채 바꿔놓으며 갖가지 에피소드와 신조어를 양산했다. 예컨대 샤오황디에겐 지갑이 6개나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친·외가 할머니·할아버지 4명과 부모 2명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자녀)에게 따로 용돈을 챙겨준다는 뜻이다. 집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성장한 샤오황디지만 막상 사회에 진출하면 웨광쭈(月光族)로 전락하기 일쑤다. 웨광쭈는 매달(月) 타는 월급을 자신 만을 위해 몽땅 써버리는(光) 사람들(族)을 가리킨다. ..
누구를 위한 혈서(血書)인가 기생에게 홀딱 빠진 남자가 ‘사랑한다’는 혈서를 써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후 기생의 집을 다시 찾은 남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가 “혈서까지 써주었는데 어찌 된거냐”고 분기탱천하자 기생은 혈서를 한가득 담아놓은 보따리를 던졌다. “이 보따리에서 당신이 쓴 혈서 찾아가세요.” 웃자고 전해진 이야기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 여인을 향한 뭇 남성들의 충성맹세가 혈서 보따리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한데 그 충성맹세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진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 김기룡·강기순 등 12명은 1909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썼다. 혈서의 내용은 ‘대한독립’이었다. 남자현 선생은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조사하러 하얼빈에 도착..
남근은 아니고…, 신라인의 지문도 있고… “단장님, 이건 꼭 남근 같습니다. 아무래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 대학원생(성균관대) 신분으로 조사에 참여하고 있던 김성태가 흥분했다. 무덤 속에 퇴적돼 있던 흙더미 속에서 범벅이 되어 버린 유물 한 점을 들고 나왔다. 꼭 남근처럼 생긴 유물이었다. 용강동 고분에서 확인된 유물. 처음엔 남근이라고 판단했지만 목없는 흙인형 . ◇무덤에서 웬 남근이? 1986년 7월 18일. 경주 용강동 폐고분을 발굴 중이던 경주고적발굴단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널길, 즉 연도와 무덤 방이 닿는 곳에 마련된 빗장 문을 열고 들어가 무덤내부에 쌓여있는 흙을 제거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핏 보아 남우세스럽게 생긴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한데. 그늘에서 흙을 잘 털어보도록 하지.” 마음이 찜찜했다. 무덤 속에 무..
'경우의 수', 그 지긋지긋한 악령 1994년 미국 월드컵 자료를 찾다가 ‘경우의 수’를 따진 기사를 검색했다. 스페인(2무)·볼리비아(1무1패)와 비겼던 한국(2무)이 독일(1승1무)과의 예선 최종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기사는 독일과의 전력차는 아랑곳 없이 갖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하다 ‘일장춘몽’으로 끝을 맺는다. ‘독일이 혹 16강전에서 쉬운 상대를 고르려고 일부러 한국과 비겨서 조 2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즉 독일이 조 2위가 되면 비교적 쉬운 나라들로 구성된 A조 2위(루마니아·미국·스위스 등)와 16강에서 만날 수 있기에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은 헛된 기대와 달리 한국을 3-2로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촌스런 기사를 누가 썼나 기자 이름을 보니 어이없게도 ‘이기환 기자’였다. 낯이 ..
폐암투병 요한 크루이프, '아름답게 이겨주길…' 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68)는 스포츠계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이다. 하루 80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체인스모커였다. 경기 중 전반이 끝나고 하프타임 때가 되면 잽싸게 담배를 피워댔으니 말이다. 훈련도 빼먹기 일쑤였다. 시건방도 무진장 떨었다. 줄담배를 피워대고 훈련에 관심도 없으면서 “축구는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월드컵 축구를 시청하느냐는 질문에 “없다. 날 TV 앞에 앉혀놓을 유능한 선수가 없으니까…”라 너스레를 떨었다. 슈퍼스타의 상징인 9번이나 10번 대신 14번을 단 이유를 두고는 “9번은 디 스테파노, 10번은 펠레가 이미 달고 있으니까 헷갈릴까봐”라 으쓱댔다. 그랬으니 ‘게으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디 스테파노-펠레-크루이프-..
중국의 화장실 혁명 “사람들이 섞여 화장실에 있는데 한 사람이 아니다(人雜厠在上非一也).” 후한 시대의 사전인 은 ‘측(厠·화장실)’의 또 다른 한자인 ‘잡(雜)’을 풀이하면서 ‘본래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북적대며 거리낌없이 볼일을 본다는 의미의 글자’라 했다. 십수년 전까지 중국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악취를 풍기는, 그것도 칸막이 없는 화장실에 들어간다는 것도 낯선 풍경인데, 볼일을 보면서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던 경험이 있었을 테니까…. 백제시대 공동화장실 복원도, 익산 왕궁리 유적 서북쪽 공방근처에 있었다. 5칸-3칸-2칸짜리 화장실 3개동이 있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후한 시대 즈음 서양의 로마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었다. 벌건 대낮 광활한 광장에 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