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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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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의 봉기 조선조 태종에게 귀찮은 존재가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잘잘못을 기록해대는 사관이었다. 1401년 태종이 화를 터뜨리며 ‘사관 금족령’을 내렸다. “편전은 임금이 쉬는 곳이야. 사관은 들어오지마!” 고구려 벽화 속에 나타난 사관의 모습. 그러나 사관 민인생은 고개를 세우고 대꾸했다. “정사를 논하는 편전에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어찌 기록한단 말입니까.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 3년 뒤인 1404년 태종 임금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임금이 급히 일어나면서 측근에게 입단속을 명했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기막힌 일이다. 사관이 ‘쓰지말라’는 임금의 오프더레코드 명령까지 고스란히 에 기록했으니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최저가 임금을 살해했다...
반기문 총장, 비오는 태산에 왜 올랐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71)이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한 다음날(지난달 4일) 산둥성 태산(泰山)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제와 새삼스레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가 있다. 차기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반총장이 중국 역대 황제들이 봉선(封禪), 즉 하늘신(封)·땅신(禪)에게 제사를 지낸 태산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대망을 품었던 김대중·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비롯, 손학규·김중권씨 등 유력한 정치인들이 오른 경험이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9월4일 우산을 쓰고 중국 산둥성 태산(泰山)을 등정하는 사진이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공개됐다.|웨이보 반 총장이 태산에 올랐을 때 비가 내린 것도 참새들의 입방앗거리가 됐다. 중국에서 ‘태산에 오를 때 비를 맞으면 큰 뜻을 이룬다’는 우중등태산(雨中登泰山)의 속..
남달랐던 조선왕실의 태교법 “나라를 세운 것은 임금을 위해서인가. 백성을 위해서인가.”(임금 영조) “임금도 위하고 조선도 위해서입니다.”(세손 정조) “대답이 좋지만 분명히 깨우치지 못했구나. 나라를 세운 본뜻은 백성을 위해 세운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스스로를 받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봉양하기 위해서다. 민심을 잃으면 임금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느니라. 스승보다 더 백성을 두려워 해야 한다.”(임금 영조) 1575년 태어난 ‘경룡 아기씨’(광해군)의 태를 묻었다는 내용을 담은 태지석과 태항아리. 보물 1065호로 지정됐다. 1762년(영조 38년) 4월 25일 11살짜리 세손 이산(정조)이 69살 할아버지 영조 임금과 일문일답식 구술시험을 치렀다. 사부로부터 배운 지식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날의 대화는 ..
투탕카문과 네페르티티 왕비 1922년 11월 고대 이집트의 ‘소년왕’인 투탕카문(Tutankhamun·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자 심상찮은 소문이 돌았다. 관 뚜껑에 ‘파라오(왕)의 잠을 깨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10살 무렵(기원전 1361년) 즉위한 뒤 19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요절한 소년왕의 ‘저주’라는 것이었다. 5개월 후인 1923년 4월 무덤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카나본 경이 공교롭게도 면도 중에 생긴 상처 부위를 모기에 물린 뒤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투탕카문 미라의 얼굴에 난 상처와 똑같은 부위였으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에 소장된 네페르티티 흉상. 독일 고고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1914년 이집트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굴한 뒤 독일로 ..
약사불 앞에 선 아픈 정치인들 “약사(藥師)는 의사의 이름을 빌렸다. 악귀를 물리치고, 온갖 재앙에서 보호받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는 약사여래의 이름을 부르면 구제받는다.”() 약사여래는 ‘약사’라는 이름만 불러도 온갖 질병과 모든 재난을 없앤다는 부처님이다. 학문적 연구에 치중했던 초기 불교가 대중과의 괴리감 탓에 인기를 잃자 ‘기복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약사신앙으로 병을 고쳤다는 신묘한 기록이 등에 보인다. “선덕여왕의 병이 깊어지자 밀본법사를 불렀다. 법사가 여왕의 침실 밖에서 을 읽은 뒤 지팡이를 던지자 늙은 여우 한 마리를 찔러 뜰 아래로 내던지니 여왕의 병이 나았다.”( ‘신주·밀본최사’조). 지난 13일 서울 능인선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계최대규모의 약사대불.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는 치유의 부처로 알려져 ..
신라왕릉, 도굴에서 살아남은 비결 “청일전쟁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 금사발이 묻혀있다던가 혹은 금닭이 운다던가 하는 전설을 퍼뜨리며….”( ‘고분발굴만담’, 1932년) 일제강점기에 경주의 고분을 발굴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행각을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본인조차 낙랑고분과 가야고분, 고려고분 등이 무차별 싹쓸이 도굴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마저 한숨 쉰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고분들이 있었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텁게 쌓은 형태였다...
'난신적자'에겐 공소시효가 없다 기원전 621년 춘추시대 진(晋)나라 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에서 천자(주나라 양왕)을 위해 회맹식을 열었다. 제후 가운데 최고 실력자인 문공이 다른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자(양왕)를 위해 베푼 충성맹세의 장이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천토지맹(賤土之盟)’이라 일컫는다. 이로써 진 문공은 춘추시대 제후국을 대표한 첫번째 ‘춘추5패’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공자가 쓴 역사책인 가 이 역사적인 팩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천자가 하양(河陽)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고만 기록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명백한 왜곡이었다. 공자는 과연 왜 그랬을까. 1905년 을사늑약 장면을 그린 당대의 풍자그림. 왜병의 총칼 앞에서 서명하는 을사오적과 고종 황제,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백제와 신라 철천지 원수가 된 사연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엄청난 유물이 나왔다. 백제예술의 정수 금동대향로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신라유물이 단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이 유적은 고구려는 물론 중국·서역의 문물이 엿보이는 국제문화교류의 창구였는데도 유독 인접국인 신라의 유물만 없는 것이다. 왜일까. 알다시피 이 능산리 절터는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절이었다. 역사적으로 백제와 신라는 총 66회(백제멸망 이후 부흥군과 싸운 8회의 전쟁 포함)를 싸우며 패권을 다퉜지만 밀월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익에 따라 협력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게 외교가 아닌가. 백제·신라는 고구려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삼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