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353) 썸네일형 리스트형 기황후, '고려판 한류' 열풍의 주역 <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이었습니다.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물(貢物)’로 끌려가는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1333년 14살의 나이로 끌려간 기씨 소녀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습니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복면 사관'과 역사가의 조건 정부는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복면 사관’을 만든 겁니다. 뿐이 아니라 집필자의 원고 등을 심의할 심의위원들의 명단도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사람들은 흔히 전근대적인 행위나 사고를 ‘왕조시대’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비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왕조시대인 조선의 사관선발 절차를 한번 보겠습니다. 과연 ‘왕조시대’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왕조시대의 사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사관이 갖춰야 할 조건이 3가지라 해서 ‘삼장(三長)’이라 했습니다. 삼장의 덕목을 갖춘 사관을 뽑는 작업은 혹독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입니까.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 빼빼로데이 말고 젓가락데이 어떨까 차진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젓가락은 생명의 상징이다. 1998년 충북 청주 명암동의 고려시대 석관묘에서 먹(墨)과 철제 젓가락, 중국 동전 등 3종 세트가 발굴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죽어서도 밥은 굶지 말고(젓가락), 공부는 계속해야 하며(먹), 부자가 되라(동전)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 죽은 이가 사용했던 젓가락을 대문에 걸어두고, 일본에서 1877년 야마가타현(山形縣)에 젓가락무덤(御箸陵)을 세워 제사까지 지내며 신성시한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젓가락을 부모의 신체와 동일시하는 풍습은 비슷하다. 상 위의 차려진 젓가락의 길이가 다르면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죽는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지금도 식당에서 가장 먼저 상 위에 놓은 젓가락의 키를 재보지 않는가. 또 젓가락이 부러지면 불.. 잃어버린 백제 한성백제의 출현(하) 1998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체가 된 풍납토성 발굴이 시작됐다. 성벽 안쪽에서 한성백제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백제인들이 쌓은 성벽의 축조방법도 초미의 관심거리였기에 발굴이 시작된 것이었다. 1920년대 풍납토성 모습. 해자, 즉 성을 막기위한 주변의 도랑시설이 보인다. ◇감개무량한 발굴 “높이는 한 6~7m 정도나 될까. 폭은 한 10여m?” 애초에 발굴단은 현존하는 성의 모습으로 볼 때 그 정도려니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와. 이게 뭐야.” 발굴기간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끝도 없는 판축 토루와 성벽을 보호하는 강돌·깬돌이 열 지어 있고 성벽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수직목과 식물유기체들. 발굴 결과 폭 43m 이상에 현존 높이 11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 잃어버린 백제, 풍납토성의 발견비화(상)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 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풍납토성 유구. 493년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다.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 1925년 여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가 한강변을 휩쓸었다. 한강이 범람했고, 강변에 .. 광주에서 발견된 2000년 전 현악기 지난 1992년 5월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였던 조현종이 광주 신창동을 찾았다.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가 한창이던 현장이 아무래도 걸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무작정 공사현장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42년전에도 어린아이 독무덤이 발굴된 곳인데요. 그렇다면 당대 사람들이 경작한 농경지 유적이 있을 게 분명한데 아무런 조사 없이 공사가 강행되니까요. 고고학자들이 공사현장을 찾으면 담당자들이 무척 싫어하니까 신분을 속이고 이리저리 살폈죠.” 독무덤이 발견된 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연약지반, 즉 농경지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유심히 살피던 조현종은 극적으로 2,000여 년 전 역사의 실마리를 잡는다. “2,000년 전 홍수 등에 의해 범람했던 흔적인 퇴적층에서 모래와 흙을 긁어모아 비닐에 담.. 소황제와 6개의 지갑 ‘샤오황디(소황제·小皇帝)’는 1979년 시작된 중국의 1가정 1자녀 정책의 산물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격동기를 겪은 부모세대는 가난과 무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하나 뿐인 ‘금쪽같은 내 새끼’를 꼬마황제로 떠받들며 키웠다. 이 정책은 중국 사회의 근간을 뿌리채 바꿔놓으며 갖가지 에피소드와 신조어를 양산했다. 예컨대 샤오황디에겐 지갑이 6개나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친·외가 할머니·할아버지 4명과 부모 2명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자녀)에게 따로 용돈을 챙겨준다는 뜻이다. 집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성장한 샤오황디지만 막상 사회에 진출하면 웨광쭈(月光族)로 전락하기 일쑤다. 웨광쭈는 매달(月) 타는 월급을 자신 만을 위해 몽땅 써버리는(光) 사람들(族)을 가리킨다. .. 누구를 위한 혈서(血書)인가 기생에게 홀딱 빠진 남자가 ‘사랑한다’는 혈서를 써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후 기생의 집을 다시 찾은 남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가 “혈서까지 써주었는데 어찌 된거냐”고 분기탱천하자 기생은 혈서를 한가득 담아놓은 보따리를 던졌다. “이 보따리에서 당신이 쓴 혈서 찾아가세요.” 웃자고 전해진 이야기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 여인을 향한 뭇 남성들의 충성맹세가 혈서 보따리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한데 그 충성맹세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진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 김기룡·강기순 등 12명은 1909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썼다. 혈서의 내용은 ‘대한독립’이었다. 남자현 선생은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조사하러 하얼빈에 도착..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4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