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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불 앞에 선 아픈 정치인들 “약사(藥師)는 의사의 이름을 빌렸다. 악귀를 물리치고, 온갖 재앙에서 보호받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는 약사여래의 이름을 부르면 구제받는다.”() 약사여래는 ‘약사’라는 이름만 불러도 온갖 질병과 모든 재난을 없앤다는 부처님이다. 학문적 연구에 치중했던 초기 불교가 대중과의 괴리감 탓에 인기를 잃자 ‘기복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약사신앙으로 병을 고쳤다는 신묘한 기록이 등에 보인다. “선덕여왕의 병이 깊어지자 밀본법사를 불렀다. 법사가 여왕의 침실 밖에서 을 읽은 뒤 지팡이를 던지자 늙은 여우 한 마리를 찔러 뜰 아래로 내던지니 여왕의 병이 나았다.”( ‘신주·밀본최사’조). 지난 13일 서울 능인선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계최대규모의 약사대불.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는 치유의 부처로 알려져 ..
신라왕릉, 도굴에서 살아남은 비결 “청일전쟁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 금사발이 묻혀있다던가 혹은 금닭이 운다던가 하는 전설을 퍼뜨리며….”( ‘고분발굴만담’, 1932년) 일제강점기에 경주의 고분을 발굴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행각을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본인조차 낙랑고분과 가야고분, 고려고분 등이 무차별 싹쓸이 도굴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마저 한숨 쉰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고분들이 있었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텁게 쌓은 형태였다...
연산군은 왜 두려운 것은 역사 뿐이라 했나 이번 주 팟 캐스트는 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은 왜 역사가 두렵다고 했을까요. 또하나 궁즘증이 생깁니다. 역대 임금들은 왜 사관을 싫어했을까요.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답니다. 사관의 입시를 막고 정사를 논했답니다. 태종은 사관은 보기 싫으니 편전에서 나가라고 명했답니다. 그러나 사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다고 당당히 말했답니다. 그렇다면 사관들은 왜 임금이 싫다는데 목숨을 걸고 역사를 기록했을까요.하나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역사와 사관을 싫어했던 임금들이라도 역사와 사관을 존중했다는 겁니다. 예컨대 중종 임금은 임금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 기록하고야 마는 귀찮은 사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
'난신적자'에겐 공소시효가 없다 기원전 621년 춘추시대 진(晋)나라 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에서 천자(주나라 양왕)을 위해 회맹식을 열었다. 제후 가운데 최고 실력자인 문공이 다른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자(양왕)를 위해 베푼 충성맹세의 장이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천토지맹(賤土之盟)’이라 일컫는다. 이로써 진 문공은 춘추시대 제후국을 대표한 첫번째 ‘춘추5패’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공자가 쓴 역사책인 가 이 역사적인 팩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천자가 하양(河陽)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고만 기록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명백한 왜곡이었다. 공자는 과연 왜 그랬을까. 1905년 을사늑약 장면을 그린 당대의 풍자그림. 왜병의 총칼 앞에서 서명하는 을사오적과 고종 황제,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거세당한 사마천이 죽지 않은 이유 2017학년부터 한국사가 수능과목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고 봐야죠. 하지만 여전히 역사는 암기과목으로 기억됩니다. 그 지긋지긋한 '태정태제문단세~'로 이어지는 암기의 행렬이 뇌를 떠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란 과연 암기과목이고 어려운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훨씬 지난 시기에 역사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를 쓴 사마천이라는 분이죠. 알다시피 남성의 중요부위를 잘리는 형벌, 즉 궁형의 처벌을 받고도 '발분의 저작'이자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남긴 분입니다. 사마천은 왜 거세형을 당했으며, 왜 그런 치욕을 받고도 살아남으로 했을까요. 그가 남긴 는 천하의 역사서라 할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의 주제입니다./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
백제와 신라 철천지 원수가 된 사연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엄청난 유물이 나왔다. 백제예술의 정수 금동대향로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신라유물이 단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이 유적은 고구려는 물론 중국·서역의 문물이 엿보이는 국제문화교류의 창구였는데도 유독 인접국인 신라의 유물만 없는 것이다. 왜일까. 알다시피 이 능산리 절터는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절이었다. 역사적으로 백제와 신라는 총 66회(백제멸망 이후 부흥군과 싸운 8회의 전쟁 포함)를 싸우며 패권을 다퉜지만 밀월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익에 따라 협력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게 외교가 아닌가. 백제·신라는 고구려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삼년산..
누가 '몰카'의 원조인가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역의 영주가 가혹한 세금을 매기자 그의 아내 고다이버가 “제발 세금 좀 낮춰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영주는 실현 불가능한 조건 하나를 달았다. ‘당신이 벌거벗고 성안을 한바퀴 돌면 모를까.’ 하지만 방년 16살이었던 고다이버는 실행에 옮겼다. 다만 주민들에게 ‘내가 말을 타고 알몸으로 지날 동안 창문을 닫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세금 문제가 걸려있었으니 주민들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톰이라는 양복재단사가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했다. 창문 틈새로 몰래 여인의 알몸 행진을 감상했다. 청년은 하늘의 벌을 받아 눈이 멀고 말았다. 관음증을 뜻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여기서 말이 나왔다. 못말리는 인간의 관음 성향을 일러주는 ..
이색의 굴욕과 이순신 가문의 중국어 교육법 예나 지금이나 외국어는 ‘통곡의 벽’입니다. 천부적인 언어능력을 자랑하면 모르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옛날의 기록을 살펴보면 외국어 때문에 절명하고 망신당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신진사대부의 스승으로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목은 이색이 바로 굴욕의 대표주자입니다. 조기중국어교육에, 유학은 물론 북경에서 관리로까지 일했던 이색이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대의 중국어는 꼭 오랑캐 같다’는 핀잔을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반면 이순신의 5대조 할아버지인 이변은 서른이 넘어 급제했지만 그야말로 불철주야 중국어를 공부한 덕분에 역사에 남는 문신 출신 통역관이 됐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증조할아버지(이거)도 그 어렵다는 외교문서를 줄줄 읽을 정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