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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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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의 비밀…40만년전 사용된 나무창의 정제 석기시대(stone age)하면 떠오르는 도구는 역시 석기, 즉 돌이다. 그러나 돌 말고도 하나 더붙여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나무다.물론 인류는 처음에는 돌도끼 같은 도구를 이용했지만 점차 효용성 증대에 골몰하게 됐다. 독일 쉐닝겐 구석기 유적에서 거의 완형에 가까운 10여점의 나무창이 쏟아졌다. 석기시대는 흔히 ‘돌의 시대’로 알려졌지만 ‘도구가 나무’의 시대, 즉 ‘석 목기 시대’라 일컬어질만 하다. |전곡선사박물관 제공 그래서 사용한 것이 나무이다. 특히 사냥도구의 관점에서 창의 등장은 획기적이었다. 창의 발명으로 사냥꾼은 안전한 곳에서 사냥감을 향해 창을 던질 수 있게 됐다. 게다가 가볍고 날카로운 창의 찌르개는 살상력을 높였다. 석기시대가 아니라 ‘석·목기 시대’라 일컬어져야 하지 않을까.고인..
'아이 울음소리' 에밀레종의 신비는 비대칭의 미학에서 비롯됐다 “비대칭성의 미학이 에밀레종의 신비를 낳았다.”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의 또다른 이름인 ‘에밀레종’은 아주 끔찍한 작명의 전설을 갖고 있다. 771년(혜공왕 7년) 도무지 종이 완성되지 않자 어린 아이를 쇳물이 펄펄 끓는 도가니에 던졌더니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종에서 어린아이의 소리처럼 ‘에밀레’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자신을 쇳물에 던지게 만든 어미를 원망하며 ‘에미 죄’라고 울부짖는 소리라는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만의 고유 맥놀이 현상을 설명하는 그래프. 성덕대왕 신종의 음파는 타종하고 대략 9.1초 후에 “…어~엉…”하고 울고는 사라지는듯 하다가 다시 한번 9.1초 후에 울음을 토해낸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처럼 표현되는 이유다.|김석현 ..
몽골의 감시아래 흐느끼며 허물어야 했던 강화성벽의 흔적 “1259년(고종 49년) 6월 강도(강화도)의 내성을 헐기 시작했다. 몽골 사신이 급하게 독촉하자 군사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성을 쌓지 말걸 그랬다.’”()고려와 28년간(1231~59년) 6차례의 전쟁을 벌인 끝에 강화협정을 맺은 몽골이 내건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강화도성을 허무는 것이었다. 몽골이 느꼈던 물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강화 중성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방어시설. 외부 침입을 막는 시설인 치와 외황(마른 도랑) 등이 발견됐다. 특히 몽골과의 항쟁이 끝나고 강화협정을 맺은 후 몽골의 압력에 의해 성벽을 허문 흔적도 보였다. |한백문화재 연구원 제공칭기즈칸이 13세기 초 제정한 법에는 “제4조=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
개로왕의 가묘인가, 제단인가…30년째 베일에 싸인 송산리 고분 석축 비명횡사한 개로왕을 위한 허묘일까, 제단일까, 아니면 석탑일까. 30년전 발굴조사 후 그 성격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유적이 있다. 무령왕릉으로 유명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정상부에 존재하는 3단 석축시설이다. 이곳은 1988년 고지자기 탐사와 이에 따른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구이다. 이를 두고 다양한 주장들이 오갔다.공주 송산리고분군 정상부에서 확인도니 3단 석축시설. 30년전 확인된 유구지만 적석총인지, 제단인지, 석탑인지 그 성격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올해 성격 규명을 위한 전면조사를 벌였지만 매장주체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문화재청 제공 먼저 돌로 쌓은 이 구조물이 특별한 시설을 갖추지 않았지만 구조적으로 서울 석촌동 2호·4호분 등의 적석총과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웅진백제 시절 ..
'자유인의 땅' 카자흐스탄과 신라는 대체 무슨 관계였을까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의 공사장에서 정체불명의 유물편이 출토됐다. 당시 전문가들은 뭔지는 모르지만 장신구의 한 부분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뿐이었다. 그로부터 65년 후인 1973년 이역만리 경주 계림로에서 벌인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 도중 성인 남자 2명이 나란히 묻힌 무덤(14호분)이 확인됐다. 오른쪽 남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는데, 왼쪽 남자는 길이 36㎝의 황금보검을 달고 있었다. 경주 계림로에서 확인된 황금보검 장식과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출토된 보검 장식. 세부 문양은 다소 다르지만 기본 모티브는 흡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그런데 일본학자들인 아나자와 와코우(穴擇和光)와 마노메 슌이치(馬目順一) 등으로부터 계림로 출토 황금 보검의 사진을 받아본 러시아 학자인 A.K. 암브로즈는 무릎을..
백제판 '포스코' 제철소, 충주 칠금동에서 확인됐다 충북 충주 칠금동이 백제시대 ‘포스코’였음을 입증해주는 제련로가 9기나 쏟아져 나왔다.칠금동 제철유적을 조사중인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21일 올해 3차발굴에서 3~4세기에 제작된 제련로 9기를 추가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에서 확인된 제련로 중 하나. 이곳에서는 총 20기의 제련로가 발견됐다. 3~4세기 백제시대 '포스코'라 할 수 있는 제철공장이 확인된 것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제공 한지선 중원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칠금동 유적이 명실상부 국내에서 단위면적당 최대 유적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면서 “밀집도로 보면 칠금동은 요즘의 포스코를 연상시킬만큼 대단위 제련공장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제련로는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드는 가마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1600년전 부부묘에서 확인하는 다자간 교류의 흔적 지난 9월 전북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에서 1600년 전 부부가 나란히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석곽묘 2기가 확인됐다. 부장유물과 무덤배치로 보아 봉분 하나에 남녀의 무덤을 함께 조성한 것으로 추정됐다. 사이좋게 조성된 석곽묘 2기(5세기 무렵) 중 1기에는 완형의 금귀고리 1점과 목걸이로 추정되는 곡옥과 채색옥이 보였다. 또 피장자의 왼팔에 착용한 팔찌로 추정되는 소옥류가 출토됐다. 다른 1기에는 다양한 토기류와 함께 철기류와 마구류가 확인됐다. 이 가운데 환두도(둥근 고리칼)가 눈에 띄었다. 전북 장수 삼고리에서 확인된 1600년전 부부묘. 부부묘에서는 가야뿐 아니라 백제, 신라, 마한 등과 역동적인 교류를 했다는 증거들이 나왔다.|전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 고분군을 발굴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의 전..
단돈 100원에 '엿바꿔 먹은' 범학리 삼층석탑의 '77년 걸린 귀환' 국립진주박물관은 요즘 아주 희귀한 국보 석탑의 전시를 위해 터파기 공사에 여념이 없다. 주인공은 국보 제105호인 경남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다. 통일 신라 양식을 계승한 범학리 석탑은 탑 외면에 부조상이 새겨져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층 기단에는 신장상(神將像·무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8구, 탑신에는 보살상 4구가 정교한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당대의 뛰어난 조각기술과 경남 지역의 불교 미술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이어서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1946년 미군공병대가 경복궁내에 복원한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 |국립진주박물관 제공그러나 이 석탑 만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섬장암을 깎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찬희 공주대 교수(문화재보존학과)에 따르면 한국 석탑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