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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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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의 '선돌', 이끼 벗겨보니 '제2의 광개토대왕비'였네 “어? 이건 ‘국토(國土)’네, 이건 ‘토내(土內)’, 이건 ‘대(大)이고….’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예성동호회는 1978년 9월 당시 유창종 충주지청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와 장준식 충주 북여중 교사(전 충청대 교수) 등이 결성한 답사모임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예성동호회는 예사로운 향토모임이 아니었답니다. 동호회를 결성한 그해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
왜 대서소 주인이 사상 첫 신라 금관 발굴(1921년)을 주도했을까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라면 훈민정음(국보 70호),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83호), 석굴암(국보 24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신라금관을 꼽을 겁니다. 금관 중에서는 1921년 발굴된 첫번째인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으뜸으로 칠 겁니다. 하지만 이 금관총 발굴이 당시 경주에서 ‘대서방’ 주인이었던 일본인 비전문가가 주도한 ‘아마추어 발굴’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또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학계는 “우리(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이라고 흥분했답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죠. ■아마추어가 3~4일만에 후딱 판 금관총 시간을 1921년으로 경주로 되돌려 볼까요.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찰하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 경찰서)의 눈에 3~4명의 아이..
물웅덩이 속 금동대향로는 백제멸망 순간의 증거였다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동북아의 운명을 건 이 국제전쟁은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이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게 된 거죠. ..
‘# 十’…경주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유물에 새겨진 비밀코드 1933년 4월 3일이었습니다.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장신구 10여점을 발견했습니다. 즉각 신고가 이뤄졌고,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07~2011)를 급파합니다. 발굴결과 순금제 목걸이 33점과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는 4월9일부터 20일과 21일까지 ‘고고학상 중대자료 희대의 귀고리 장식 발견’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아리미쓰는 유물이 발굴한 곳을 노서리 140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발굴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한국-일본-미국 합작발굴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현해탄을 건너 귀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후 국립박물관장이 된 김재원 박사(1909~1..
세종은 왜 큰아버지 정종에게 "정통성 없다" 낙인 찍었을까 조선을 다스린 임금 27분 가운데 무려 262년간이나 ‘임금’ 대접을 받지못한 분이 계신다는 거 아십니까.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44곳 중 40곳) 중에 폐위된 연산군(10대·1494~1506)·광해군(15대·1608~1623)묘와 함께 그 임금 부부의 능(후릉)이 빠졌답니다. 그거야 그 부부의 능이 북한 땅(개성)에 묻혀있으니 불가피하다 칩시다. 태조의 정부인이자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도 황해도 개풍에 묻혀있어서 제외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들이 15명이나 되었는데… 아니 그런데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조차도 그 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세종대왕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자초지종을 풀어봅시다. 그 문제의 임금이 바..
'치욕의 삼전도비문' 누가 썼나…"오랑캐 아부" 비난 너무 억울 지난 1월 30일 저는 매우 유서깊은 곳을 다녀왔는데요. 아주 좋은 곳은 아니구요. 바로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현장의 유물 중 하나인 삼전도비를 다녀왔습니다. 다녀오고 나니까 1월 30일이더라구요. 그 날이 1637년 1월30일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사건이 있던 날이잖아요. 물론 당시엔 음력이었으니까 양력으로 따지면 1637년 2월24일로 환산되더군요.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음력 1월30일로 기억되니까 뭐 겸사겸사해서 답사한거라구 저는 생각했습니다. ■수난당한 삼전도비 비문을 보면 맨 윗부분에 ‘대청황제공덕비’라는 글자가 보이는데요. 비석 앞뒷면에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어 등으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과정과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는 데요. 세부 글자는 잘 보이지 않더군요. 비석 옆에는 다소..
정조는 백발백중의 활쏘기 명수였다…워커홀릭의 반전매력 “한 발은 쏘지 않는게 군자의 도리니라.”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군사적 노력과 군사의례를 소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3월1일까지 열린다는데요. 저도 다녀왔습니다. 흔히 조선을 ‘문치의 나라’여서 ‘문약’에 빠졌다고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조선은 무치도 겸했다, 뭐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특별전이라는데요. ■신궁의 솜씨를 자랑한 정조 전 전시품 중 특히 눈에 띄는 유물 한 점을 소개하려 합니다. ‘고풍(古風)’이라는 유물인데요.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가 1792년(정조 16년) 12월 16일 활쏘기를 한 뒤 그 기념으로 함께 참가한 검교제학 오재순(1727~1792)에게 상을 내린 공식문서입니다. 그런데 고풍을 보면 정조의 활쏘기 성적이 나와있는데요. 점수가..
조미조약 1조가 뭔데…배신과 조롱으로 끝난 고종의 미국 짝사랑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조약에 서명한 이들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1822~1895)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한 국가간 수교협정이었습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조미수호통상 조약 1조 도장은 신헌에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체결된 조미수호통상 조약의 제1조 또한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