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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에게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한다" 1983년 5월 설악산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반달가슴곰이 2주 이상 고통을 호소하다가 끝내 숨졌다. 밀렵꾼들이 10여일 이상 총을 맞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곰의 동태를 살피면서 밀매꾼들과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곰의 쓸개, 즉 웅담을 키우려고 사경을 해매는 곰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더욱 기막힌 뉴스는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죽은 곰의 웅담(180g)을 4600만원에 공매처분했다는 것이다. 창경궁에서 실시된 공매의 낙찰자 인터뷰 기사까지 자랑스레 실렸다. 다른 곳도 아닌 문화재관리국이 천연기념물(제329호)의 내장(웅담)을 대놓고 팔았다는, 지금 같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뉴스가 버젓이 등장한 것이다. 이보다 앞선 1975년 9월에는 꿀바른 고기에 폭약을 넣어 반달가슴곰이 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 “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짊어지고 날마다 홍구(虹口·훙커우) 방면으로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上海·상하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서….” 1932년 4월1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충남 예산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둔채 혈혈단신 상하이로 건너온 24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다. 청년은 피혁공장과 세탁소 등에서 일하다가 훙커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백범을 찾아온 용건은 “(이봉창 의사처럼) 제발 나를 독립운동 자원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김구 선생은 허심탄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끝..
축구는 왜 ‘안녕! 단일팀’을 선언했는가 남북한 축구 대결사에서 명장면 하나가 있다. 1978년 12월20일 태국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공동우승을 차지한 남북한 주장인 김호곤과 김종민 선수가 1위 시상대에서 어깨동무한 사건이다. 그라운드에서는 으르렁댔지만 시상대에서는 한민족임을 과시한 가슴뭉클한 장면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그 장면은 ‘연출’이었다. 비좁은 1위 시상대 위에 오르려고 남북 선수들이 서로 밀치는 촌극을 빚었고, 급기야 김호곤 주장이 시상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겨우 자리를 다잡은 김호곤 선수가 “남의 눈도 있으니 잘해보자”고 속삭이고, 이를 김광민 선수가 받아들이면서 ‘어깨동무 사진’(사진)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는 남북한 축구가 벌인 치열한 신경전의 단편에 불과하다. 1960년대엔 북한이 한국을 압도했다. 예컨대 북한이 196..
남북 정상의 군사분계선 '금 밟기 놀이' 군사분계선(휴전선)은 엄밀히 따지면 군사분계점(휴전점)이라 해야 한다. 선이 아니라 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따라 유엔군·공산군측은 54년 9월까지 임진강변의 제0001호 말뚝(표지판)에서 동해안의 제1292호 말뚝까지를 지도상으로 이은 선을 군사분계선이라 했다. 그중 696개는 유엔군이, 596개는 북한군이 관리한다. 간격도 200~500m 사이로 들쭉날쭉했다. 흔히 155마일(248㎞)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디지털맵으로는 148마일(238~239㎞)로 계산된다. 어찌됐든 이 ‘지도상의 선’을 기준으로 남북 2㎞씩 만들어놓은 완충지대가 바로 비무장지대다. 그런데 휴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은 육지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즉 임진강변 이하~강화도와 황해도 ..
판문점의 어제와 오늘…무슨 일이 일어났나 1951년 7월8일과 10일 유엔군과 공산군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1년을 훌쩍 넘긴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을 시작된 것이다. 7월8일 열린 예비회담(광문동 민가)과 10일 본회담(내봉장)은 모두 개성에서 열렸다. 개성이 한국전쟁 전의 분단선인 38도선상의 도시라는 점이 감안됐다. 즉 1951년 6월30일과 7월1일 유엔군측이 “휴전을 위한 예비회담을 원산비행장이나 개성~임진강 사이의 국도상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공산군측은 “그럼 회담장소를 38도선 상의 개성으로 하자”고 회답했다. 개성이 한국전쟁 이전에는 38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회담장소로 낙점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성지역이 그 당시 공산군측의 치하에 속했다는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1951년 11월9일 판문점에서 열린 ..
'소박데기' 보물의 명예회복 1933년 4월8일 경주 노서리 215번지에서 밭을 갈던 주민 김덕언씨가 금귀고리·금반지 각 1점과 금구슬 33알을 발견했다. 김씨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추가발굴에서 나머지 금귀고리 1점과 금팔찌 1쌍 등과 금구슬 44알, 비취색 굽은 옥 1점 등을 더 찾아냈다. 금구슬 77알과 비취옥을 이으니 완벽한 목걸이가 됐다. 여기에 합체된 금귀고리 한 쌍까지…. 무덤 주인공이 차고 있던 장신구 세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물의 운명은 얄궂었다. 김씨 수습품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아리미쓰 발굴품은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 국립박물관)으로 나뉘어 이산가족처럼 보관됐다. 그러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로 일본에 있던 유물 반쪽이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문화재관리국은 1..
'못난이 아닌 개성파 국보' 인증받은 은진미륵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못생긴 불상’으로 폄훼됐다. 일본의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균형미가 없고, 머리가 지나치게 크며 면상 또한 평범하다”고 혹평했다. 고고미술사학자인 고 김원룡 박사도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얼굴은 삼각형이어서 턱이 넓고…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이라 했다. 김원룡 박사는 특히 “은진미륵이야말로 신라의 전통을 완전히 잃어버린 최악의 졸작”이라고 ‘디스’했다. 1000년 이상 그 자리에 그냥 서있는 죄밖에 없는 은진미륵으로서는 어이없이 당해온 ‘의문의 1패’였다. 지나는 사람마다 ‘삼등신’이니 ‘미련한 대두’니, ‘최악의 졸작’이니 하고 손가락질하다 못해 각종 언론 지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학술논문에까..
'팀킴' 화가 김득신이 그린 '조선 최고의 짤방' 조선 후기 풍속도의 계보는 김홍도(1745~)-신윤복(1758~?)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민들의 일상과 애환을 진솔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한 김홍도와, 양반과 기녀들의 사랑과 일탈을 때로는 애로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그려낸 신윤복의 풍속도가 워낙 빼어났다. 하지만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사이에 또 한사람의 풍속화가가 있다. 김홍도보다는 9살 아래, 신윤복 보다는 4살 위인 긍재 김득신(1754~1822)이다. 김득신의 대표작인 ‘파적도(야묘도추)’.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도망가는 장면을 포착했다. 어미닭은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뜬채 고양이를 향해 달려들고 병아리들은 사방으로 도망친다. 이 모습을 본 주인영감은 돗자리를 짜다말고 곰방대를 후려치며 뛰어들지만 역부족이다. 툇마루에서 그만..